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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마르다는 동일 인물인가? (UM News)

2023년 3월 31일

작년에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를 하던 날 은퇴하신 한 목사님이 저희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 목사님이 읽어볼 만한 글 하나를 추천해주셨습니다. 그 글은 듀크대학에서 가르치고, 인기 있는 강연자이자 저자로 유명한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 박사의 설교를 글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수련회가 있어서 바로 길을 떠났고, 좋은 한 주를 보낸 후 그 주 금요일, 피곤한 상태로 시카고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좌석에 앉아서 눈을 감으려고 할 때 마침 그 목사님이 추천하고 이메일로 보내주신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잠도 오지 않으니 글이나 읽자’는 생각으로 노트북을 켰지요.

그 설교는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1장 1~45절,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와 예수가 나오는 또 다른 유명한 구절에 관한 내용인데,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교를 읽는 동안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어요.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 설교로 인한 충격과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로 비행기에서 내내 흐느껴야만 했습니다. 아마 비행기에서 제 옆에 앉은 승객은 제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오늘 설교는 방금 소개해드린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 박사와 다가올 5월에 듀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빌라노바 대학에서 부교수로 일하게 될 엘리자베스 슈레이더(Elizabeth Schrader)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버틀러 박사와 슈레이더의 팟캐스트가 대중에게 열려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 아래에 주소를 달아두겠습니다.1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보존된 신약성경 사본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파피루스 66(Papyrus 66)입니다. 연구자들은 대략 AD 200년경에 쓰인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현재 발견된 신약성경의 오래된 사본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어로 쓰인 파피루스 66은 1952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되었지만, 현재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보관 중입니다.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동안은 돈과 시간이 많은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그곳까지 가서 파피루스 66을 직접 열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파피루스 66이 디지털화된 사실을 아시나요? 이제는 누구든 디지털 버전의 파피루스 66을 도서관에서 검색할 수 있답니다.

엘리자베스 슈레이더, 혹은 리비는 뉴욕의 제너럴 신학교에서 석사 공부를 하던 신학생이었습니다. 리비는 신학교 도서관에서 파피루스 66의 디지털 버전을 읽고 있었어요. 리비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졸업 논문을 쓸 예정이었는데, 파피루스 66에는 가장 오래된 완벽한 버전의 요한복음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는 요한복음 11장 첫 절을 읽다가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어로 11장 1절은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사는 마리아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Now a certain man was ill, Lazarus of Bethany, the village of Mary and his sister Mary).”

잠깐만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이는 지금 우리 성경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성경은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라고 이야기하거든요. 파피루스 66에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의 마을에 사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라고 마리아를 두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당연히 리비는 혼란스러웠고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마리아는 ‘MARIA’라고 씁니다. 스펠링 ‘I’는 그리스어로는 ‘아이오타(iota)’라고 부르는데, 파피루스 66의 1절에서 Maria의 ί가 모두 θ 테타(theta)로 수정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더 많은 수정을 발견했어요. 이 가장 오래된 사본에서 마리아(Μαρία)의 이름은 마르다άρθα)로 수정되어 있고, 단수 동사가 복수 동사로 바뀌어져 있으며, 대명사도 수정되어 있었습니다. 단수 명사 ‘자매(αδελφή)’는 복수 명사 ‘자매들(αδελφές)’로 수정되어 있었습니다.

리비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요. 그건 바로 누군가가 요한복음의 가장 오래된 사본을 수정했고, 마리아를 각각 다른 두 인물, 마리아와 마르다로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리비는 대학원 논문을 이것에 관해 썼고, 하버드 대학교가 그녀의 논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곤 그녀의 논문을 발표하기를 요청했어요. 그녀의 석사 논문은 2017년 Harvard Theological Review에 발표되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학 학술지에 고작 석사생의 논문이 실린 것이지요. 그녀의 발견이 매우 중요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후 리비는 마리아를 마르다로 바꾼 흔적을 다른 사본과 자료들에서도 추가로 발견하게 됩니다. 파피루스 66뿐만이 아니라 요한복음 11장이 담긴 그리스어 사본 280개 중 5개당 1개꼴로 마르다의 이름이 수정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래된 라틴어 사본에서도 3개당 1개꼴로 마르다의 이름에 수정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마리아의 이름이 수정되어 마르다로 쓰였거나, 마리아가 한 일을 마르다가 한 일로 바꾼다거나 한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리비의 연구를 뒷받침할 추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한 초기 기독교 역사 연구가는 3세기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이 직접 쓴 요한복음 11장 주석을 발견했습니다. 터툴리안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는데요, 터툴리안은 초대 교회의 아버지 중 하나로, 사실 여성 혐오 시각이 두드러져 ‘여성 혐오자’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가진 교부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AD 200년경 요한복음 11장에 관해 쓴 주석에 “마리아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Mary, confessing him, Jesus, to be the Son of God.)”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우리가 가진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입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장 25-26절) 그리고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 11장 27절)

3세기 여성 혐오자로 유명했던 터툴리안이 이 중요한 기독론적 고백이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의 고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에게리아(Egeria)는 381년 부활절에서 384년 부활절 사이에 예루살렘과 다른 중요 기독교 성지를 순례한 후 그 여정의 일지 <에게리아의 순례기(Itinerarium Egeriae )>를 남긴 사람입니다. 그녀가 기록한 순례기는 오늘날의 우리가 당시의 기독교 문화와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보면, 그녀는 ‘마리아가 예수를 만나러 달려 나가는 장소에 세워진 교회’를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성경에는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은 마르다이고 마리아는 집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에게리아에 따르면 예수를 만나러 달려 나간 사람은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인 거죠. 즉, 3세기 초기 기독교 교부 터툴리안과 4세기의 순례자 에게리아는 마리아만 언급하고 마르다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지금쯤 여러분은 ‘그래서 그게 왜 중요한 건가요?’ 하고 궁금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르다가 첨가된 것이 왜 중요한 문제일까요?

사실 그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라가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마리아 중 또 다른 마리아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의 발을 씻고 기름 부은 사람이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곳에 있던 여인 중 하나이며,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가장 먼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가장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약 마르다가 존재하지 않고, 대신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이며, 그가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이라면, 마리아는 요한복음에서 기독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마르다의 고백으로 알고 있는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 11장 27절)가 사실은 예수의 발을 씻기고 기름 부은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도 곁을 지키고, 부활하신 예수를 가장 처음 보고 사도적 명령(요한복음 20장 17절)을 들은 마리아인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이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그가 매우 중요한 권위를 지닌 자임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를 제외한 남자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는 더더욱 의미 있는 권위가 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마리아는 세 개의 다른 인물로 나누어졌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즉, 오늘 본문의 자매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은 지금쯤 또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왜 베다니의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는가요?”

그것도 설명해드릴게요.

오랫동안 성서학자들과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막달라(Magdalene)가 그녀의 출신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근처의 작은 어촌 마을의 이름이 막달라(Magdala)이고, 심지어 마을 별명도 ‘막달라 마리아의 마을(the Town of Mary Magdalene)’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여행 가이드들은 그 마을을 ‘막달라 마리아의 마을’로 소개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정확한 설명은 아닌데요, 왜냐하면 예수께서 생존하신 당시 1세기의 그 마을 이름은 막달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가 유명해지고 난 후 지난 2000년간의 역사 속에서 갖게 된 이름입니다.

‘타워 마리아’

엘리자베스 슈레이더는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가 ‘막달라 출신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막달라’는 하나의 타이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인 아랍어에서 ‘막달라’는 ‘타워 또는 탑’을 의미합니다.

반석 베드로와 타워 마리아(Peter the Rock and Mary the Tower)

이제 제가 전하고자 한 큰 그림은 모두 전했습니다.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마태 16:1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부터 그는 시몬 베드로, ‘반석 시몬’이라 불리고,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 즉, ‘타워 마리아’라고 알려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혹시 “그럼 마르다는 아예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존재합니다. 그러니 마르다를 사랑하는 모든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로 나오는 누가복음 10장의 두 자매와 오늘 말씀인 요한복음 11장의 두 자매가 각기 다른 자매라고 생각하는 신약학자들이 있답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누가복음 10장 38절에 근거합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예수께서 사신 1세기 이스라엘은 여성에게 매우 억압적인 사회였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재산으로, 대부분의 여성은 혼자 살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나 남편, 혹은 남자 가족의 소유물이었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0장 38절은 마르다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 따르면, 마르다는 분명 나사로라는 오빠(혹은 남자 동생)가 버젓이 있는 사람입니다. 남자 형제가 있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면, 반드시 남자 가족의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마르다에게 나사로라는 형제가 있었다면 38절에서 마르다는 나사로의 여동생으로 소개되고, 자기 집이 아닌 ‘자기 오빠의 집’으로 예수를 초대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의 마르다는 버젓이 ‘자기 집’이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0장은 나사로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지요.

성경학자들이 의문을 가지는 부분은 누가복음 10장에 이 자매가 살고 있는 마을을 ‘베다니’라고 한 번도 지칭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사실 베다니 마을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예수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여행하시는 경로에서 완전히 반대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여행 경로상 갑자기 베다니로 저녁 초대를 받아 가시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지요.

그러므로 누가복음 10장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는 요한복음 11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마을에 사는 다른 자매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성실하고 헌신적인 아름다운 마르다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테니, 염려를 놓으세요.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 박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2

  • 만약 마리아가 지난 2000년간 기독교 역사에 원래의 요한복음이 쓰인 대로 알려져 있었더라면, 지금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만약 우리가 반석 베드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워 마리아 또한 알고 있었더라면, 만약 우리가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뿐만 아니라, “그리고 내가 이 타워와 함께 굳게 서리라”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알고 있었더라면, 지금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일까?

오래전 로마의 바티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바티칸 광장에서 두 개의 거대한 석상을 보았는데, 천국의 열쇠를 쥔 베드로와 자신이 쓴 편지를 쥐고 있는 바울의 석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아시다시피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 따라 바티칸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 ‘타워 마리아’가 요한복음에 원래 쓰인 그대로 지난 2000년간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더라면, 아마도 저는 바티칸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아닌 베드로와 마리아의 석상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성 목사인 저는 시카고 한복판에 있는 교회에서 많은 방문자로부터 “여자 목사는 처음 봐요!”라는 인사말을 듣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여러분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타워 마리아가 우리에게 좀 더 친숙했더라면,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요?

아마 더 많은 여성 장로와 더 많은 여자 목사뿐 아니라 더 많은 여자 감독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회 내 중요한 결정을 짓는 자리에 더 많은 여성이 앉아서 중요한 대화를 이끌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여자가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할 때, 그 길을 막는 무수한 목소리와 문화가 있는 지금, 그런 목소리가 조금도 힘을 발휘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마리아들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존엄성 위에 타워(막달라)로 굳게 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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