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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에서 안디옥으로 (UM News)

2022년 7월 8일

편집자 주: 본 기사는 한인목회강화협의회가 2022년 6월 27-28일 이틀간 줌으로 주최한 <미래를 향한 거룩한 대화(Holy Conferencing on What’s Next?)>에서 김정호 목사가 발표한 내용이다.)

이번 목회강화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웨비나에서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 받았을 때, 저는 주저했습니다. 솔직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연합감리교회라는 거대한 교단도 ‘거룩한 대화’가 불가능해진 지금, 한인 교회가 교단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나 미력하다는 자괴감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슨 발언을 하고 나면, 말꼬투리를 잡아, 악용하는 일들도 많았었기에, 선뜻 발표를 하겠고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한인 공동체에 속한 여러 구성원이 다양하게 참여하는 ‘거룩한 대화’가 없었고, 나의 솔직한 생각을 나누는 것이 내가 한인 공동체를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교단 분리 문제를 통해 제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과거에는 의견이 달라 서로 싸우고, 미워해도 함께 모여서 의견을 나누었다면, 이제는 한인 공동체 안에 역사와 미래를 공유하는 식구(공동체)’라는 전제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30여 년 전에 시카고 감리교연합회 모임에서, 여자 목사 한 분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자, 기도가 끝난 후 그 기도를 문제 삼는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기도가 무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라고 한 기도를 누가 무효화 하느냐고 선배 어른들에게 항의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싶으면 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라 하고 싶으면 어머니라 부르면 되지, 어찌 연합회 이름으로 한 기도를 무효화 한다는 것이냐고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그 선배 어른을 찾아가 나와 함께 그 어른의 발언에 반대 의견을 내었던 젊은 목사들과 무릎 꿇고 사과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신념을 끝까지 붙들고, 선배 목사님에게 “목사님! 내용은 저희가 틀리지 않았지만, 태도는 좋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런 일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함께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인 공동체는 각자가 속한 그룹끼리 따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모이면 불편하고 불평하는 일들이 있었어도, 한인총회로 모일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한인총회가 모이지 않으면서 서로 관계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는 모두 작아지고 못나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살면서 사람은 성장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인종,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성숙해지고 넓어지기도 합니다.

여자는 없고, 남자만 있다면 우리는 반쪽입니다. 그만큼 작아지지요. 동성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자가 없으면, 그 교회는 순결한 교회일까요?

나는 신앙의 과제는 순결이 아니라 성숙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그동안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니, 교회 건물에 연합감리교회 십자가와 불꽃으로 된 연합감리교회 로고를 붙이고, 간판만, 이름만 연합감리교회였지, 진정한 연합감리교 교인이나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대화’가 안된다는 자체가 연합감리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 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대화’는 고사하고, 대화가 아니라 자신들의 일방적인 생각을 주장하고,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하는 부끄러운 수준이 되었습니다.

대화가 가능하려면, 우선 대화 상대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제가 사위는 왜 말을 안 하느냐고 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아들이 화를 내면서, “아빠가 언제나 가족이 모두 모이면 혼자 말을 다 하니까 그렇지!” 하는 겁니다. 온 식구가 다 놀라고, 저는 화가 나서,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아마도 그날 아들은 누나들과 엄마에게 혼이 났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시 들어가니, 아들이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잘못을 빌려고 내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그리고 아무 말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저는 가족들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내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에겐 그럴 권리도 없을뿐더러,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30여 년 전 연합장로교단에 한인노회들이 생기면서,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다른 교단의 목사들과 교회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연합장로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목사들이 대거 가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갈라지고 또 갈라지더니, 나중에는 동성애자 목사 안수 문제로 진통을 심하게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도 한인연합감리교회도 그런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단뿐만 아니라, 개체교회도 그렇습니다.

나는 새 가족들이 입교할 때, 부목사들에게 정말 연합감리교회의 교인이 되겠다는 사람들만 입교시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그냥 아무나 입교 문답에 ‘네’하고 교인이 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교회만 들락날락하다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일이 생기면 목사 흉보고, 교회 시끄럽게 하다 교회를 나가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소모적인 목회에 대해 회의가 듭니다.

진짜 제대로 된 연합감리교회다운 목회를 해야 합니다.

진정한 연합감리교회가 되자는 말은 동성애 목사의 안수를 지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제가 느낀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연합감리교회가 기본적으로 왜 목회를 하는지, 왜 교회/교단이 존재하는지 그 본질과 선교 목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연회가 열리기 전 ‘정회원 세션’으로 먼저 모일 때, 항상 다같이 일어나 ‘Are we yet alive’(생전의 우리가 또다시 만났네) 찬송을 부르며 서로를 환영했습니다. 싸움터 같은 세상에 나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일 년에 한 번 ‘연회’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은 후, 또다시 목회 현장으로 나아가 목회하고 선교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우리 교단은 목회 현장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싸우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연회’나 ‘총회’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어젠다를 통과시키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싸우느라 바빠, 개체 교회의 필요나 복음 전파 및 선교를 소홀히 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개체 교회를 위해 있어야 할 연회나 총회가 아니라, 연회나 총회를 위해 개체 교회가 존재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 교단의 진영논리를, 보수(orthodox)라고 생각하는 한 축은 성경적으로 무엇이 옳은가(biblical correctness)?를 말합니다. 또 진보(progressive)라고 생각하는 한 축은 정치적으로 무엇이 옳은가(political correctness)?에 빠져있습니다.

저에게 성경에서 타협이 불가능한 것은 예수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들은 사안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도 저는 괜찮다 생각합니다.

성경은 저에게 큰 도서관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 예수님, 하나님의 백성, 교회에 대한 말씀 등이 담겨 있고, 저는 그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생명, 사랑, 행복, 축복 등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성경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무엇이 옳은가?’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가 우선입니다. 인간의 성 문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고, 대하셨을까?가 저의 판단의 잣대가 됩니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셨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잘 모르겠으면, 나중에 주님 만날 때 물어보면 되겠다고 여기고 맙니다.

지금 우리가 애를 써도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해결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동성애에 대해서는 물론 동성애자 목사안수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안에 대해, 절대적인 진리 문제로 갈등하면 안 되고, ‘거룩한 대화’를 해야 하는데, 지금 그것이 안 되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가는 글로벌감리교회(Global Methodist Church, GMC)도 쉽지 않을 것이고, 연합감리교회(UMC)에 남아서 사역하겠다는 사람도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리 문제로 싸우며 계속 차이점만을 늘어놓다 보니, 상호존중과 상호합력의 길은 놓치고, 비방과 비난만 난무하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저는 동성애 목사 안수 문제 때문에 개인적으로 난감한 일을 참 많이 당했습니다.

한번은 몇 년 전 뉴욕 연회를 하던 중,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찾아와 제게 “목사님이 예언자 사명을 가지고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한인 교회들을 바꾸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그런 예언자 역할까지 해야 해? 그리고 왜 그대는 한인 교회를 무지몽매한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하는가?”하고 물었습니다. 한인 교회를 우습게 여기는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이비 진보들도 주변에 없지 않습니다.

또 어느 목사는 “목사님 나이가 드시니 판단 능력이 흐려지셨나 봅니다.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시려고 비겁하게 후러싱제일교회 교인들을 선동해 교단을 탈퇴하려고 하시나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나이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부귀영화를 누리려 한다거나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사안을 후러싱제일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의논한 적이 없으며, 내가 교인을 선동하는 목사도 아닐 뿐 아니라 교인들이 목사에게 선동당하는 시시한 교회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줄도 모르고 막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교리 문제로 싸우다, 아무나 함부로 막 이야기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감리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선행하는 은총(Prevenient Grace)’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의인으로 예정되었고, 너는 죄인으로 예정되었다.”라는 식의 천박한 예정론자들이 연합감리교회 안에 많아졌습니다. 그것은 내로남불입니다. 진보나 보수나 자신들이 하면 다 좋은 것이고, 반대편이 하면 다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그런 진영논리는 우리 모두를 위선자로 만들 뿐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거룩한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부끄럽고 수준 낮은 언행들에 대해 크게 실망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땅에 떨어져 죽다 살아난 후 사도 바울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연합감리교회도 땅에 떨어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다메섹에서 땅에 떨어지고, 아라비아 사막에 들어가서 푹 썩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았던 안디옥이 되기란 우리에겐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한인 교회들 중에도 교단을 탈퇴하기 위해 준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쉽게 나갈 수 있는 연회에 속한 교회들은 쉽게 나갈 것이고, 어려운 교회들은 어렵게 나갈 것이며,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연회에 속한 교회들은 못 나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가는 교회는 알아서 잘하면 되고, 남게 되는 교회는 남아서 잘하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로 분열된 타 교단의 현실을 보면, 이런 진통을 겪고 난 후에는 잘 모이지 않게 되고, 교회의 상황마저 어려워진 경우도 있습니다.

목사가 신앙 양심과 목회 생명을 걸고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주는 교단을 탈퇴한다고 설교 시간에 열을 올리며, 교단 탈퇴를 강경하게 주장했는데, 정작 교단을 탈퇴하지 못하게 되어 목사를 불신임하게 되고, 교인들과의 관계마저 힘들어진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UMC에 남게 되는 한인 교회들은 어찌 될까요?

동성애 지지하는 교단에 남아있다는 이유로, 내외적 갈등이 표면화될 것입니다.

코란은 아랍어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와 다르게 기독교 종교개혁의 역사는 성경 번역의 역사입니다.

개신교는 새로운 언어로 계속 번역되어 땅끝까지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달려 창조적인 변화를 하지 못하니, 죽어가는 것이라고 전 교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전 교수님의 이런 지적이 현 UMC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한 모임에서 청년들이 저를 찾아와 저에게 동성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동성애 문제를 얘기할 때 떠오르는 사람과 이름 그리고 얼굴이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에 대해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인간의 삶과 아픔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이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겐 아주 뼈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30여 년 전 시카고에서 목회할 때, 지방 성직위원회에 아주 능력 있는 신학생이 목사 후보생으로 인터뷰하던 중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그의 목회자 후보로서의 자격을 두고 투표를 했는데, 반대 3표, 찬성 3표가 나와, 결국 위원장이 캐스팅 투표를 해야 했고, 그가 기권표를 내는 바람에 투표는 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한 주 후, 너무도 아프고 불행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일리노이 연회가 개최되었고, 저는 그 개회 예배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의 사람들로 사랑과 소망을 주어야 할 사명이 있음에도 한 젊은이에게 좌절과 증오를 안겨주는 일을 하는 죄를 범했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당시 기권표를 냈던 그 위원장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하는 내내 울었고, 연회의 참석자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다른 정치적인 것들에는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한인 목사로서 동성애 목사 안수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겠어서 기권표를 낸 것이었지만, 지방성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저는 지금도 제가 그 젊은이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가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사람이 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어쩌면 지금 연합감리교회가 지나가고 있는 이 어두운 터널의 과정은 천지가 창조될 때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고, 어둠이 빛이 되었던, 무의미가 거룩한 의미를 찾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좋아하는 말인 “애쓰지 말아라.”를 끝으로 발표를 마치려 합니다.

한 승려가 조주(778~897)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요?”

“힘을 쓰지 말아라.”

“힘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달음을 얻습니까?”

“힘을 쓰는 것, 그 자체가 곧 어긋나는 일이지. 너무 힘을 써서 몰아붙이면, 병을 얻거나 힘들게 된다.” 

시편 46:10은 “너희는 잠잠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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